요즘 은행 앱에서 돈 보낼 때 지문 한 번 찍으면 끝납니다. 10초도 안 걸리죠.
그런데 2000년대 중반에는 이게 30분짜리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절에 개발을 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환경이었어요.
오랫동안 저도 "한국은 왜 저렇게 갈라파고스로 갔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번에 정리해보니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미국의 암호 수출 규제였습니다
이 대목을 알고 나면 그림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40비트 제한에서 액티브X까지 · 선택의 연쇄
199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암호 기술을 전략 물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해외로 수출되는 브라우저에는 40비트까지만 허용했어요.
40비트가 어느 정도냐면, 1997년 장비로도 3시간 반이면 뚫리는 수준이었습니다. 이걸로 은행 업무를 하라는 건 무리였죠.
그래서 1999년에 국내에서 SEED라는 128비트 알고리즘을 직접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기술적으로 타당한 판단이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SEED를 아는 브라우저가 세상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암호니 당연한 일이죠.
그럼 어떻게 브라우저에 집어넣느냐. 그때 마이크로소프트가 내놓은 게 액티브X였습니다. 브라우저 안에서 프로그램을 직접 돌릴 수 있는 기술이요. 결국 그 길을 택합니다. 공인인증서 제도도 같은 해에 시작됩니다.
그런데 액티브X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돌아갔습니다. 은행과 관공서를 쓰려면 IE를 켜야 하는 나라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깔리는 데 1년, 걷어내는 데 20년
더 흥미로운 건 그다음입니다.

공인인증서 21년, 액티브X 26년의 궤적
200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설치의 시대였습니다. 은행 사이트 한 번 들어가면 키보드 보안, 개인 방화벽, 백신, 인증서 모듈까지 서너 개를 깔아야 했어요. 중간에 재부팅도 한 번 하고요.
2014년에 이른바 "천송이 코트" 발언이 나옵니다. 규제개혁 토론에서 중국인이 액티브X 때문에 드라마 속 코트를 못 산다는 지적이 나왔죠. 나중에 실제로는 해외카드로 구매가 가능했다는 반론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발언으로 논의에 불이 붙습니다.
2015년부터 걷어내기가 시작되는데, 여기서 웃픈 일이 벌어집니다. 상당수가 exe 설치 프로그램으로 모습만 바꿔 살아남았습니다. 액티브X는 없앴는데 여전히 뭘 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공인인증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건 2020년 12월 10일입니다. 개정 전자서명법이 시행되면서 '공인'이라는 독점적 지위가 사라졌어요. 1999년부터니까 21년 만입니다.
액티브X가 돌아갈 마지막 무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2022년 6월 15일에 지원이 끝났습니다.
그때가 과했던 게 아닙니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 느껴집니다.

같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단계 · 9단계 30분에서 3단계 10초로
예전에는 아홉 단계에 30분이 걸렸고, 지금은 세 단계에 10초면 끝납니다.
그런데 이걸 두고 "예전 사람들이 이상한 걸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계가 줄어든 게 아니라 기반이 바뀐 것이거든요.
지금 설치할 게 없는 이유는 암호화가 브라우저와 운영체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따로 깔던 기능을 이제는 기기가 기본으로 갖고 있어요. 그때는 브라우저가 해주지 않는 일을 각자 떠맡아야 했던 겁니다.
남는 생각
정리하면서 제일 오래 생각한 대목은 이겁니다.
미국이 암호 수출 규제를 풀고 128비트 SSL을 누구나 쓸 수 있게 된 뒤에도, 우리는 액티브X를 계속 썼습니다. 제약은 사라졌는데 선택은 남은 거죠.
왜냐하면 그 사이에 시스템이 깔렸고, 그 시스템에 맞춰 법이 생겼고, 그 법에 맞춰 일하는 방식이 굳었기 때문입니다. 기술 문제였던 게 제도 문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게 남 얘기 같지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게 표준이니까" 하고 쓰는 것들 중에도, 사실은 옛날 제약 때문에 시작됐는데 이유는 사라지고 관성만 남은 것이 있을 겁니다.
액티브X를 욕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20년 뒤에 누군가 지금 우리 코드를 보면서 "왜 저렇게 했지?" 할 수도 있겠죠. 그때 그 사람도 우리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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